2022년 가을 학기에는 하나의 주제와 관계를 맺고, 그 과정을 시각화하는 시간을 가지며 작업자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번에 심상에 드러나게 된 주제는 ‘틀’인데, 반복적으로 걸려 넘어지는 지점, 혹은 고정관념과 연관이 있다. 더불어 일상에서 마주치는 자잘한 과거의 흔적을 마주하고 결별하기도 하는 모습이 모더니즘과 닮아 있다는 생각으로 연결되었다.
지난 봄학기는 심리적으로 고통을 느낀다고 할 수 있는 감각이 지배적이었다. 갈등을 마주할 때, 자신을 몰아세우고 스트레스 및 회피 욕구가 극도로 심해지며 반복적으로 무기력해지는 증상을 보였다. 무력화된 상태가 마치 불투명한 막으로 이루어진 상자나 울타리, 통틀어 표현하자면 ‘틀’ 속에 갇힌 것만 같았다. 그런데 ‘틀에 갇힌 상태’를 감각적으로는 인지하지만 정확하게 정의하지 못하는 막연함에 답답함을 느꼈고, 이 내밀한 상태를 시각화하여 물질적인 대상으로 꺼내 확인하고 싶었다. 그렇게 내가 느끼는 ‘틀’이란 게 어떤 범주의 틀인지에 대한 고찰이 시작되었고, 이 사유의 과정과 질문들을 작업에 녹이면서 ‘틀’을 대하는 나의 태도를 기록했다.
‘틀’이란 단어는 ‘틀에 갇히지 말라’는 이야기로 어렵지 않게 들어볼 수 있다. 아마 강의나 책 또는 누군가의 조언이었을 텐데, ‘기존의 것을 탈피해도 괜찮다는 의미’에서 사용되었을 것이다. 그럼 ‘기존의 것’이란 무엇일까. 틀은 사전적으로 1) 일정한 격식이나 형식이거나 2) 사람 몸이 외적으로 갖추고 있는 생김새나 유형이라고 정의한다. 첫 번째 의미가 모호하여 격식格式과 형식形式을 한자로 찾아보았다. 격식은 ‘격식 격’에 ‘법 식’을 사용하고, ‘격’을 ‘나무 목’과 ‘각각 각’, 즉 ‘나무를 가지치기하여 모양을 바로잡는다’라는 뜻으로 풀이하면 기준을 갖고 ‘일정하게 모양을 가다듬는 규칙’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형식은 ‘모양 형’에 ‘법 식’을 사용하고, ‘형’을 ‘평평한 방패 두 개가 가지런히 비슷한 모양을 갖고 있다’라는 뜻으로 풀이하면 ‘공통적으로 갖춘 모양으로 절차나 사물을 특정짓는 방식’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렇다면 ‘틀’은 ‘대상과 현상을 살펴보고 정리하는 일정한 시각’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대상과 현상을 살펴보는 기준은 한 개인의 성장 환경, 사회 경험, 관심사 등에 따라 형성된다. 한 사람의 결이라고 일컬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렇게 형성된 고유한 시각은 여러 다수와 교집합을 이루고 있기도 하고, 여러 교집합이 모여 사회를 만든다. 다만 다양한 시각들이 모일 때 다름을 경험하게 되는데, 어떤 이들은 자신의 시각을 상대에게 강요하기도 한다. 주변인일 수도 있고 사회라는 다수일 수도 있다. 그 시각 차이에 위계가 생기기 시작하면 옳고 그름으로 상대를 판단하고 재단한다. 이 위계를 가질 때, 틀은 폭력이 되기도 한다.
내가 느꼈던 ‘틀’을 직관적으로 표현하자면 ‘나는 ______ 해야/여야 해’라는 무의식적 판단의 말들이다. 틀이 폭력이 되었던 경험이 있었고, 그 후로부터 내면의 판단자가 생겨 특정 관념을 강요하는 목소리들이 생겼다. 하지만 고정관념은 이분법적인 결론으로 치닫기 십상이다. 예를 들면, ‘사랑받지 않으면 불행해’라는 고정관념이 어떤 상황에서 발현되고, 함께 떠오른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기 위해서는 내가 어떤 상황에 처해있든 누군가 도움을 청할 때 ______한 목소리와 ______한 태도로 상대해야 해’라는 해결법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하지만 불안 때문에 생성된 해결법은 오류가 있기 마련이고 자연스럽지 않으며 강박적인 경향이 있어서 마치 어디에 갇힌 듯한 느낌이었다. 내가 마주한, 내가 관계를 맺는 ‘틀’은 누군가에 의해 강요된 시각에 더불어 불안 때문에 생성된 강박적인 해결까지의 일련의 과정을 포함한다. 이는 ‘틀’에 대한 사전적인 정의와 내가 인식한 ‘틀’의 정의가 약간 다름을 나타낸다.
초반에는 ‘틀’에 대한 정의가 구체적으로 확립되지 않았지만, 생각들을 글과 작업으로 정리해가면서 모호함이 걷히기 시작했고 나를 둘러싸던 ‘틀’의 실체를 조금씩 이해할 수 있었다. 확인된 고정관념의 대상들은 다양했다. 그러나 고정관념의 실체를 낱낱이 분해하기보다는 하나의 현상으로 축약하여 ‘틀’이라 정의하고 작업을 진행했다. ‘틀’이라고 넓게 설정한 이유는 틀 자체보다 그에 대응하는 나의 태도와 틀과의 관계성에 집중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틀에 갇혀 불안함을 느낄 때도 그저 바라만 보려고 노력했다.
나는 틀에서 벗어나고 갇히기를 반복했다. 몸의 감각만 오롯이 인식하는 즉흥 움직임을 할 때는 틀에서 벗어난다. 마치 자유를 염원하는 하나의 의식과 같다. 이내 틀에 다시 갇히기도 하지만 심연에 무기력하게 빠져있는 것이 아니라, 각 순간을 포착하고 영상물, 활판 작업, 조형 작업으로 표현했다. 작업을 위해 내면 현상에 깊이 개입하지 않고 객관적으로 지켜보니 틀 속에 머무르면서도 다시 나가리라는 희망을 품고 고요히 호흡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는 점에서 발전이 있었다. 또한 틀에서 벗어나고 갇히는 상태가 반복적인 굴레같이 느껴지지만, 되풀이가 아닌 미세한 인식의 변화로 이어졌다는 점도 발견할 수 있었다. 틀과의 충돌은 끊임없는 과거로부터의 결별이었다. 이에 따라, 틀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은 생각에 발생한 무기력감은 극복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했다.
틀과의 관계 변화는 수업 시간에 다루었던 모더니즘과 사뭇 닮아있다. 착착은 모더니즘이 ‘과거로부터의 결별’이라고 했는데, 이는 ‘틀에서 벗어나는’ 것과 유사하다. 충돌 에너지로부터 새로운 담론이 발생하고 변화가 생긴다. 다만 모더니즘 또한 ‘틀에 갇히기’도 한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념에 오류가 발견되거나 더 이상 최적의 방식으로 채택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모더니즘이라는 정신도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이름에 의해 다시금 과거로서 결별 되니 말이다. 틀에서 벗어나기 위해 변화를 꾀했지만, 그 변화는 다시금 틀이 된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사실 우리는 일상에서 매 초마다 모더니즘을 경험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탐색해 온 ‘틀’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보았다. 아직 모호한 부분들이 많지만, 지금까지의 궁금함을 지속해서 들여다보니 점점 해상도가 높아진다는 점이 흥미롭다. 궁금함을 추적하는 글쓰기를 계속 이어 나가려고 하는데, 더 탐색하고자 하는 부분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역사와 현재 진행되고 있는 예술적 사조는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파악 가능한지에 대한 것이다. 그 사조를 대하는 예술인들의 태도는 무엇인지, 그것을 어떻게 작업화하는지 알고 싶다.
더 나아가 시간적 개념의 ‘시대’와 그 시대를 아우르는 ‘사조’의 관계성과 상호 작용이 궁금해졌다. 때로는 과거에 만연했다가 져버린 이념이 현재에 다시 떠오르기도 하는 것 같은데, 어떤 변화가 생기는지 탐색하고자 한다. 최진석 교수의 강연에서 흐르듯이 인지되었던 지점이라 이 질문은 조금 더 구체화할 필요도 있다. 그에 따르면, 노자의 시대에서 공자의 시대로 넘어가는 춘추전국시대에는 노자의 이념보다 공자의 이념이 더 만연하였지만, 현대에는 노자의 이념이 더 적합하다는 그의 의견 때문이다.